2002년 6월 29일, 제11회 서해수호의 날을 맞이했다. 오늘 전국 KBO리그 개막전과 K리그 경기장에서는 플레이볼과 킥오프에 앞서 숙연한 묵념이 진행된다. 스포츠 팬들에게 2002년은 4강 신화라는 영원한 환희의 해로 기억되지만, 그 이면에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픈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2002년 6월 29일, 월드컵의 환희 뒤에 숨겨진 연평해전의 비극은?
2002년 6월 29일 저녁 8시.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는 한국과 터키의 2002 한일 월드컵 3·4위전이 막을 올렸다. 4강 신화를 이룩한 태극전사들의 마지막 무대였다. 경기 시작 불과 11초 만에 하칸 쉬퀴르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벼랑 끝에 몰렸지만, 이을용이 전반 9분 환상적인 왼발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터뜨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후반 추가시간 송종국의 만회골까지 터졌지만 최종 스코어는 2-3 패배. 하지만 6만여 관중과 전 국민은 아낌없는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같은 날 오전 10시 25분, 서해 연평도 서해상에서는 전혀 다른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북한 경비정의 기습 포격으로 시작된 제2연평해전이다. 참수리 357호정의 장병들은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바다를 지켰다. 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6명의 영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붉은 악마의 함성이 한반도를 뒤덮던 그 순간, 서해의 푸른 파도는 붉게 물들고 있었다. 스포츠의 가장 빛나는 순간과 국가 안보의 가장 어두운 비극이 교차한,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역설이다.
김대중 연평해전 축구 결승전 참석, 왜 논란이 되었나?
비극의 여파는 다음 날인 6월 30일 일본 요코하마 국제종합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과 독일의 월드컵 결승전으로 이어졌다. 호나우두의 멀티골로 브라질이 2-0 승리를 거두며 통산 5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역사적인 매치업이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시선은 그라운드가 아닌 귀빈석을 향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서해상에서 교전이 발생해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월드컵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한일 양국 정상이 결승전에 함께 참석하기로 한 외교적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이 결정은 24년이 지난 2026년 현재까지도 매년 서해수호의 날이 돌아올 때마다 스포츠 팬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국가적 비상사태 속에서 군 통수권자가 전사자들을 뒤로한 채 축구 결승전 관전을 강행한 것은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반면,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2002년 FIFA 월드컵의 공동 개최국 국가원수로서 대회의 성공적 피날레를 장식하고, 북한의 도발에 흔들리지 않는 대한민국의 안정성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한 불가피한 승부수였다는 반론도 팽팽히 맞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