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부산의 대표적인 부랑인 수용 시설 '영화숙' 인권유린 피해자 180여 명에게 총 511억 원 규모의 국가 배상을 확정했다. 그러나 주무 부처인 법무부가 올해 배정된 국가배상금 예산이 전액 소진되었다는 이유로 실제 배상금 지급을 전면 중단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1960년대 벌어진 끔찍한 국가 폭력에 대해 60년 만에 사법부가 국가의 불법 행위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정부마저 상소를 포기해 판결이 최종 확정됐음에도, 행정부의 경직된 예산 운용이 고령의 피해자들을 다시 한번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고 있다.
기업 실적 발표 시기엔 코스피 8600 환호…국가 배상금 지급은 왜 멈췄나?
현재 한국의 거시 경제와 자본시장은 전례 없는 유동성과 자본 팽창을 경험하고 있다. 2026년 5월 2일 23시 09분 기준 코스피 지수는 6,598.87(-1.4%)을 기록하며 6500선 위에서 견고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코스닥 역시 1,192.35(-2.3%)를 기록 중이며, 글로벌 증시의 지표인 나스닥은 25,114.44(+0.9%), S&P500은 7,230.12(+0.3%)로 연일 역사적 고점을 시험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1,473.1원으로 다소 높은 수준을 보이고, WTI유가 배럴당 101.94달러, 금값이 온스당 4,629.90달러를 기록하는 등 복합적인 매크로 환경 속에서도 외국인과 기관의 국내 증시 자금 유입은 멈추지 않고 있다. 심지어 비트코인 가격은 7만 8698달러(약 1억 1597만 원)에 달하며 위험 자산에 대한 투자 심리가 극에 달한 상태다.
특히 시장 참여자들의 시선은 온통 상장사들의 이익 지표와 코스피 연간 전망치 상향 리포트에 쏠려 있다. 신한투자증권 등 주요 증권사 연구원들은 AI(인공지능) 혁명에 따른 반도체 업종의 폭발적인 수출 호조와 비반도체 기업들의 동반 이익 개선을 근거로, 코스피가 연내 8600선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분석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투자자들이 기업 실적 발표 시기에 맞춰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개인 투자자들이 기업 실적 발표 보는 곳을 찾아다니며 매수 버튼을 누르는 동안 국내 증시 전체 시가총액은 사상 처음으로 6000조 원을 돌파했다. 시가총액 1조 원을 넘긴 이른바 '1조 클럽' 기업만 400곳을 넘어선 상황이다. 이처럼 민간 자본과 기업들의 잉여금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고 있지만, 정작 국가가 국민의 짓밟힌 인권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한 금고는 철저히 비어 있다. 511억 원이라는 국가 배상금 총액은 현재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중소형 상장사 단 한 곳의 시가총액에도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규모다.
511억 원 예산 고갈의 역설, 기업 실적발표일 앞둔 시장과 대비되는 이유는?
개별 기업의 분기 재무제표와 확정된 배상금을 비교하면 국가의 '예산 부족' 논리는 더욱 궁색해진다. 현대건설의 1분기 실적을 살펴보면, 건축·주택 부문 준공 현장의 원가 반영 영향으로 수익성이 다소 둔화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분기 단 3개월 만에 1809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상장을 앞둔 인터넷전문은행 케이뱅크 역시 1분기 실적 발표에서 기업대출 확대를 바탕으로 전년 동기 대비 두 배 이상 폭증한 332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달성했다. 단일 민간 기업이 불과 한 분기 만에 벌어들이는 순이익이, 국가가 수십 년 전 저지른 중대한 인권 유린에 대해 180여 명의 피해자 전체에게 지급해야 할 배상금 규모와 맞먹거나 이를 훌쩍 뛰어넘는다.
증권가 달력에 다음 기업 실적발표일을 붉은색으로 표시하며 배당금과 시세 차익을 기다리는 주주들과 달리, 70대에 접어든 영화숙 피해자들에게는 배상금을 수령할 명확한 '지급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숙 사건은 1964년 부산에서 발생한 참혹한 강제 수용 및 인권 유린 사태다. 거리를 떠돌던 9세 아동,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역 앞에서 껌과 신문을 팔던 소년 등 무고한 시민들이 아동보호시설이라는 명목하에 영화숙으로 강제 연행됐다. 피해자들의 법정 증언과 과거사 조사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갇혀 매일같이 이른바 '원산폭격', '나룻배' 등으로 불리는 가혹한 구타와 기합,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폭행 후유증으로 목소리를 잃거나 영구적인 신체 장애를 입은 이들이 다수이며, 구타로 사망한 수용자의 시신을 가마니에 말아 뒷산에 암매장했다는 참혹한 증언까지 모두 법정에서 사실로 인정됐다.
지난 1월 법원이 180여 명의 피해자에게 총 511억여 원, 1인당 평균 약 2억 8000만 원의 국가 배상 판결을 선고했을 때, 피해자들은 마침내 60년의 기나긴 한을 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주무 부처인 법무부마저 상소를 포기하며 판결은 그대로 최종 확정됐다. 그러나 국가가 쥐여준 것은 배상금이 아니라, 2026년도 국가배상금 예산이 전액 소진되었으니 기약 없이 기다리라는 통보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