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와 자본, OTT 시장의 핵심 변수로 부상하다
최근 공개된 tvN 드라마 '화양연화 2026'이 티빙(TVING)에서 기록적인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공개 첫 주 만에 이 드라마의 다시보기 누적 시청 시간은 1억 시간을 돌파하며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이는 단순한 인기 현상을 넘어, 2026년 현재 국내 콘텐츠 시장의 권력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명확한 지표다.
‘본방사수’라는 개념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제 VOD(Video on Demand), 즉 '다시보기' 시장이 새로운 격전지가 되었다. 소비자는 더 이상 방송사의 편성표에 자신의 일정을 맞추지 않으며, 오히려 플랫폼들이 소비자의 시간을 점유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는 수조 원 규모의 미디어 산업 전반의 규칙을 재정의하고 있다.
본방사수는 정말 과거의 유물이 되었는가?
‘본방사수’의 종말은 단순한 시청 습관의 변화를 넘어선, 미디어 소비의 근본적인 혁명을 의미한다. 2000년대 초반 DVD와 블루레이가 물리적 소유의 시대를 열었다면, 201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스트리밍은 ‘소유’에서 ‘접근’으로 권력을 이전시켰다. 시청자는 더 이상 콘텐츠를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콘텐츠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원할 뿐이다. 이는 방송사가 쥐고 있던 편성권이라는 절대 권력이 시청자 개개인에게로 완전히 이양되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변화는 콘텐츠 제작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 드라마들이 매주 시청자의 애를 태우며 다음 회차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클리프행어’ 엔딩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한 번에 모든 에피소드를 공개하여 시청자가 밤을 새워 정주행하게 만드는 ‘빈지워칭(Binge-watching)’ 모델이 표준이 되었다. 플랫폼들은 정교한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시청자가 하나의 콘텐츠 소비를 끝내자마자 다음 콘텐츠를 추천하며, 플랫폼 생태계 안에 최대한 오래 머물도록 유도한다. 한 미디어 전문가는 이를 "시청자의 시간을 점령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과거에는 방송사가 정해진 시간에 시청자를 TV 앞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이제는 플랫폼이 24시간 내내 시청자의 손안에서 대기하며 '언제든 저를 선택해주세요'라고 외치는 시대입니다.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단순히 재미있는 콘텐츠를 넘어, 시청자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는 강력한 습관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 김성철 미디어미래연구소장
킬러 콘텐츠가 VOD 시장의 판도를 결정한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다시보기'는 통신사 IPTV의 부가 서비스에 머물렀고, 상당수는 불법 다운로드에 의존했다. 그러나 2016년 넷플릭스의 국내 서비스 시작은 시장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넷플릭스는 막대한 자본과 직관적인 UI를 기반으로 시장을 빠르게 장악했으며,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개념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2026년, 시장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넷플릭스의 독주 체제가 막을 내린 것이다. CJ ENM의 티빙과 지상파-SKT 연합의 웨이브(Wavve)가 합병하여 연초 출범한 '티빙 웨이브(가칭)'는 단숨에 국내 1위 사업자로 부상했다. 여기에 쿠팡의 자본력을 기반으로 한 쿠팡플레이와 디즈니·마블 IP를 보유한 디즈니플러스가 가세하며, 국내 OTT 시장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춘추전국시대: 주요 플레이어들의 생존 전략
각 플랫폼은 저마다 다른 생존 전략으로 이 무한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단순히 자본을 쏟아붓는 것을 넘어, 각자의 강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이 분화되는 양상이다.
- 티빙 웨이브: K-콘텐츠의 '바다'
CJ ENM의 방대한 콘텐츠 제작 능력과 유통망, 그리고 지상파 3사의 방송 콘텐츠 아카이브가 결합된 '티빙 웨이브'는 '한국인이 가장 즐겨 찾는 콘텐츠는 모두 여기에 있다'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화양연화 2026'과 같은 블록버스터 드라마는 물론, '유 퀴즈 온 더 블럭', '나 혼자 산다'와 같은 국민 예능의 다시보기 독점 공급은 강력한 무기다. 최근에는 프로야구(KBO) 온라인 독점 중계권까지 확보하며 스포츠 팬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 명실상부한 '국민 OTT'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합병 시너지로 연간 1조 원이 넘는 콘텐츠 투자가 가능해진 점도 경쟁의 저울추를 기울게 하는 요인이다. - 넷플릭스: '글로벌 히트'를 향한 선택과 집중
시장 1위 자리를 내주었지만, 넷플릭스의 저력은 여전하다. '오징어 게임', '더 글로리'의 성공 신화를 잇는 초대형 글로벌 프로젝트에 자원을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국내 시장 점유율보다는 한국에서 제작한 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성공하는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 하지만 높아진 제작비와 원-달러 환율 부담으로 인해 과거처럼 모든 장르에 걸쳐 공격적인 투자를 하기는 어려워졌다. 최근에는 국내 유수 제작사들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검증된 IP를 기반으로 한 스핀오프 제작에 눈을 돌리는 등 '안전한 흥행'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 쿠팡플레이: '와우' 멤버십을 위한 강력한 미끼
쿠팡플레이의 전략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따른다. 쿠팡의 이커머스 서비스인 '로켓와우' 멤버십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이를 위해 손흥민 선수가 활약하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전 경기 독점 생중계, 'SNL 코리아'와 같은 독점 예능, 그리고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내한 공연 생중계 등 다른 OTT에서는 볼 수 없는 '이벤트성 콘텐츠'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다. 콘텐츠 자체의 수익성보다는 '와우 멤버십' 이탈 방지 및 신규 가입 유도가 핵심이기에, 출혈 경쟁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 디즈니플러스: IP 제국의 딜레마
마블, 스타워즈, 픽사 등 막강한 글로벌 IP를 보유한 디즈니플러스는 충성도 높은 팬덤을 기반으로 꾸준한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하지만 강력한 IP가 오히려 한국 시장에서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K-드라마와 예능이 주류인 국내 시장에서 '그들만의 리그'에 갇힐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무빙', '카지노'의 성공 이후 이렇다 할 대형 오리지널 히트작을 내놓지 못하면서, 로컬 콘텐츠 제작 역량 강화라는 시급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 치열한 경쟁의 승패는 결국 누가 더 강력한 '다시보기' 콘텐츠를 확보하는지에 달려있다. '화양연화 2026'과 같이 공개와 동시에 폭발적인 화제를 일으키고, 장기간 회자되며 반복 시청을 유도하는 이른바 '킬러 콘텐츠'의 확보가 플랫폼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러한 콘텐츠 하나가 수십만 명의 신규 가입자를 유치하고 기존 가입자의 이탈을 방지하는 핵심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가성비'와 '피로감', 보이지 않는 전쟁의 이면
화려한 콘텐츠 경쟁의 이면에는 소비자들이 느끼는 ‘구독 피로감(Subscription Fatigue)’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보고 싶은 콘텐츠가 플랫폼마다 흩어져 있다 보니, 서너 개의 OTT를 동시에 구독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이는 가계 통신비 부담으로 직결된다. 월평균 4~5만 원에 달하는 구독료는 더 이상 가볍게 볼 수 없는 지출이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은 특정 킬러 콘텐츠가 공개될 때만 가입했다가 시청이 끝나면 바로 해지하는 ‘메뚜기족’으로 변모하고 있다.
플랫폼들은 이러한 고객 이탈(Churn)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넷플릭스를 필두로 시작된 계정 공유 유료화 정책은 이제 업계 표준이 되었으며, 이는 단기적인 수익 개선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소비자들의 반감을 샀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광고 기반 요금제(AVOD)다. 월 구독료를 낮추는 대신 광고 시청을 의무화하는 이 모델은 '가성비'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하며 빠르게 시장에 안착하고 있다. 2026년 현재, 국내 OTT 신규 가입자의 약 30%가 광고 요금제를 선택할 정도로 비중이 커졌다. 이는 OTT 기업들의 수익 모델이 구독료(Subscription) 중심에서 광고 수익을 포함한 하이브리드 모델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